Archive for September 2007
의미없는 그림
The Small Mart Revolution – Michael Shuman
1998년 여름에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Village Foundation이라는 작은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보스였던 Michael Shuman씨가 이번에 새로운 책을 냈다.
“The Small-Mart Revolution”
1998년에 그가 썼던 책은 “Going Local”이다. 아, 벌써 10년 전 일이네.
책 이름 두 개만 소개해도 그가 지향하는 방향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이메일을 통해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는데, LinkedIn이라는 인맥관리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다가 거기서 Shuman씨와 다시 연결이 되어 ‘친추’했다가 이메일을 몇번 주고 받게 되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요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고 알려줬는데, 자기가 이번에 새로 쓴 책을 보내주겠다 했다. 그 책이 오늘 도착했다. ‘The Small-Mart Revolution”
월마트가 미국의 지역의 경제 사이클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한국에서는 너무 쉽다. 이마트와 홈플러스가 지역의 경제 사이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마트와 홈플러스가 여기저기 퍼져나가면서 지역상인들이 죽어나가는 현상은 미국은 이미 10년 전에 겪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What’s Eating Gilbert Grape?)에서도 묘사된다. 그게 Shuman씨가 “Going Local”을 썼을 때랑 비슷하네.
젊은이들이 지역의 조그만 가게에서 알바로 일을 하면서 미래에 자신의 가게를 차릴 꿈을 꿀 수 있었던 때는 별로 멀지 않은 과거였다. 지금은 이마트에서 ‘좋은 하루 되십시오’라고 말하면 허리를 구부리는 알바에서 시작해서 물건 쌓는 알바로 옮겼다가 물건 옮기는 알바로 옮겼다가 캐시어 알바로 옮겼다가 … 끝없는 알바 인생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KTX 여승무원들이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이라고 말하며 고개 숙이는 것도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재벌(자본)은 점점 비대해지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면서 양극화가 심화되는 고리를 어디선가 끊어줘야 하는데 그 답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The Small-Mart Revolution”에서 그 답이 나올지는 읽어봐야 알겠다. 그가 이 책에서 답을 주든 그렇지 않든 Michael Shuman씨는 나에겐 정말 좋은 귀감이 되는 분이다. 자신의 출세와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아랫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는 못되먹은 꼴통들이 바글바글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분을 보기 힘들다.
보도 자료 좀 잘 써서 줘
얼핏 들으면 그럴싸 하지만, 좀 생각해보면 코메디인 일이 있다. 신문사 기자나 통신사 사장 같은 사람들이 정부 부처나 기업체를 돌면서 홍보 교육을 한다. 홍보 교육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정부 기관이나 기업체에서 좋은 일을 하면 그걸 잘 알리는 게 필요하니까. 그런데 그 홍보교육의 상당 부분은 ‘보도 자료 잘 쓰기’에 할당된다.
그게 코미디다. 왜냐하면, ‘보도 자료 잘 쓰기’의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신문 기사하고 유사하게 쓰느냐이기 때문이다. 한 번 더 풀어서 쓰면, 공무원이나 기업체 홍보담당 직원이 보도자료를 신문기사처럼 써갖고 오면 그걸 그냥 카피 페이스트(CTRL+C, CTRL+V)만 하면 신문 기사 완성이라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신문기자가 갖다 쓰기 쉽게 보도 자료를 만들어서 주면 신문기자한테 간택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그렇게 홍보력을 높이는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찬 나같은 사람들은 그냥 기자들이 보도 자료 받아서 날로 하루 일거리 채우려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실 통폐합 한다 할 때 기자들이 그렇게 들고 일어난 것은 이런저런 여러 이유가 있지만, 예전처럼 날로 받아서 하루 일거리 채우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마당에 결정타를 정부가 날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음, 아까 NYT의 디워 까는 기사 이야기를 쓰다 보니, 영어권 기자들의 훌륭한 글들과 한국 기자들의 그저 진부하고 판에 박힌 듯한 글들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다 보니 이것도 생각이 나서…
NYT 디워 까는 기사
뉴욕타임즈에 디워가 기대된다는 평이 떴다길래 찾아 봤으나 잘 안 나오길래 잊고 있었는데, 오늘 wallflower 블로그에 링크가 되어 있네. 영어권의 주류 매체 기자들은 글 쓰는 기술이 탁월하다. 어떻게 다들 훈련을 받는지 모르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보면 전달하는 내용에 신경을 쓸 뿐 아니라 전달하는 방법(수사)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
뉴욕타임즈 기사는 읽기에 재미있다. 근데 너무 많은 걸 동시에 까네. 첫 문단에서 삼성하고 현대부터 까기 시작하더니 두번째 문단에서 바로 심형래를 깐다. ‘an ambitious and expensive endeavour called “Dragon Wars”‘라는 표현부터가 이 기사가 디워 까는 기사라는 복선이다.
다섯 번째 문단에서는 한국 영화 산업의 규모를 놓고 한 번 까는데, 이건 디워가 제작비는 미국 SFX(특수효과) 영화의 평균에 못 미치지만 마케팅비는 미국 기준으로도 많은 액수를 썼다는 문구와 대비를 이루면서 디워가 내용보다는 마케팅으로 승부하는 영화라는 말을 한다.
그 다음에는 정부 지원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왜 뜬금없이 언급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심형래 쪽에서 준 보도 자료를 쓴 것이 아닌가 싶은데. 문화관광부나 유관 기관에서 영화 제작에 지원을 해주는지 모르겠으나, 디워가 영어로 제작되는 영화라서 정부 지원을 못 받은 것이 사실인가? 왜 이런 위험한 발언들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영구 아트는 산업자원부로부터 3D 그래픽 기술 개발 명목으로 연구비 지원을 받은 것으로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알맹이를 들여다보니 지원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 판단되어서 지원이 중단된 바 있다. 이런 기사를 보고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정부는 또 무엇인지? 요즘은 정부가 지나치게 ‘친절’한 것 같다. (김승연, 정몽구, 심형래 같은 사람들한테만)
어쨌든.
그 다음 문단부터는 걍 디워 갖고 말장난 하는 것이다. ‘헐리우드는 디워 개봉에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다’ –> 이건 걍 팩트이다. 근데 거기에 가수 비가 덩달아 까인다. 거기다가 영화 ‘괴물’도 같이 까인다. 미국에서 겨우 230만 달러 한 영화가 나름 성공한 영화로 취급된다는 조소다.
디워 땜에 삼성, 현대, 한국 정부, 가수 ‘비’, 영화 ‘괴물’이 줄줄이 끌려나와서 까인다.
그 담에는 걍 스트레이트로 디워를 깐다. 영화 각본이 Z 등급(N이나 O 등급도 아니다)이라느니 ‘I will petition for the makers of this movie to crawl under rocks”라느니 하는 말들은 비록 인용한 표현들이지만 이 기사의 핵심 부분이다.
근데, 이런 기사가 ‘디워가 기대된다’라고 썼다고 옮긴 국내 신문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옳바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확함에 대해서는 굳건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적어도 언론계에는 찾기가 쉽지 않아졌다.
유부남의 매력은 안정감
일전에 퍼다 올린 유부남과 사귀는 처녀들에 달린 댓글에도 대충 비슷한 말이 있는데, 어제 또 집에 오는 길에 잡상을 하다 보니 그 글이 떠올랐다.
거기에 비해 유부남들은 마누라한테 빡센 개인과외 몇 년씩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자 심리에 도통했습니다. 기념일 챙겨야한다는 것도 배우고, 선물같은것도 할줄 알고, 여자가 토라졌을 때 이벤트를 만들어서 감동시킬줄도 알고, 아무리 지진아라도, 이렇게 하면 기분나빠하고 저렇게 하면 좋아하더라…..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야단맞아가면서 마누라한테 배운거, 밖에 나와서 처녀들에게 복습합니다. 감동이지요. 미숙한 총각들 보다가 이렇게 능숙한 남자들 보면 놀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줄 모르고 깜박 넘어갈만합니다.
대부분의 유부남들, 직장에서 상사이거나 암튼 지위가 있습니다. 처녀들, 말단이거나 신입이거나 그렇지요. 지위가 주는 무게와 권위가 그들의 자상함과 합쳐져서 환상적인 인간형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예전에 제 후배가 대학생이었을 때 그렇게 말하더군요.
“왜 멋있는 남자들은 다 꽁꽁 숨어있다가 유부남으로 나타나는거야?”
꽁꽁 숨어있다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 유부남들 총각이었을때는 하나도 안멋있는 남자들이었습니다. 그 마누라들이 그 상태로 데리고 살기 힘들어서 몇 년씩 때배고 광내서 이만큼 만들어 놓은 겁니다. 여자마음 아는거, 사람관계에서 배려해야하는거, 점잖고 여유있는거, 잘 어울리고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는 옷, ….. 전부다 마누라들이 만들어놓은겁니다. 그들이 이룩한 사회적 지위도 마누라 등골빼서 올라간 놈들도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유부남들도 같은 생각일까? 유부남을 사귀는 처녀들은 어떤 생각일까? 이전 댓글에서도 썼지만, 나는 남자들이 결혼하고 나서 더 꾀죄죄해진다는 생각을 한다. 총각들은 나름 자기 돈으로 새옷도 사입고 머리도 멋있게 하는 등 나름대로들 신경 쓴다. (모르지. 저 글을 쓴 사람의 남편은 젊어서 꾀죄죄하게 하고 다녔는지도. ) 결혼하고 나면 오히려 외모에 잘 신경들 안 쓰더라. 잡아놓은 물고기에 미끼 안 준다는 말 있지 않는가? (이거 심각하게 잘못된 인식이지만 많은 경우에 통용되는 것 같다. 요즘처럼 이혼 잦은 세상에 결혼 했다고 물고기 잡았서 어항에 가둬뒀다고 생각할 여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 어쨌든 내가 아는 유부남들은 결혼 전보다 외모에 신경들을 덜 쓰더라. 그 마누라들도 신경을 안 쓰는지 어쩌는지는 모르지만, 걍 외모만 놓고 보면 결혼해서 외모 챙기는 게 좀 덜하더란 말이지.
기억해야 할 것은 남자든 여자든 한 이성상대와만 자면서 평생을 사는 것은 자연법칙에 맞지 않다는 것. 결혼이란 계약제도의 본질이 부자연스러운 일부일처제를 강요하는 데 있으니까. 남자든 여자든 좀더 괜찮아보이는 이성, 혹은 좀 색다른 이성에 관심을 보이는 행동을 평생 멈추지 않는다. 그걸 억제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할 뿐이지.
유부남이 처녀를 만나는 건 그 유부남이 자신이 맹세한 결혼의 서약을 지킬만큼 이성적인 의지가 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게 일차적 이유다. 두번째 이유라면 아내가 자신을 남편에게 매력적인 사람으로 계속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자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그 아이를 키우는 데 온갖 정서을 들인다. 그 과정에서 남자가 든든한 보호자가 되기를 바란다. 아이를 기르는 데 남자는 조역이다. 이것 역시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가 생기는 것은 여자는 아이를 키우는 데 집중하느라 자신을 예쁘게 꾸미지 못하거나 꾸미지 않는다. 즉 남자에게는 덜 매력적인 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 부부 사이에 애정 파탄이 생긴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대부분의 포유동물들은 수컷이 암컷과 교미를 하고 나서 암컷이 회임(? 이건 왕비가 임신?)을 하게 되면 수컷은 그 암컷에게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아내가 임신하고 나서 아내에 대해 성적 자극을 못 느끼게 되었다는 남자들 많다.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아내들은 남자들을 멋지게 꾸미는 데 신경쓸 일이 아니다. 남자들 멋지게 꾸며서 집에서 그윽히 바라보려고? 남자들은 그 사이에 처녀들을 만나고 있을텐데.
원래는 처녀들이 왜 유부남에게 끌리는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음, 처녀가 유부남에게 끌리는 이유는 유부남이 안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꽤 오랫동안 정설이었다. 그리고 그 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자들은 안정적인 환경에서 사랑하고 싶어한다. 이건 새끼를 낳아서 길러야 하는 모든 포유류들의 공통된 성향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바꾸면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다. 그 안정적인 환경이란 무리 지어 사는 원숭이의 경우에는 우두머리 원숭이의 곁을 말하는 것이고, 사자의 경우는 외톨이 숫사자가 아니고 무리를 이끄는 숫사자의 옆을 말한다. 그리고 유부남은 그렇게 안정적인 환경이라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꾀죄죄하더라도 그건 이미 무리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의 여유이고, 잘 챙겨 입고 다니면 그 역시 안정적인 환경에서 뿜어나오는 포스이다.
많은 포유류들을 관찰하면 이미 짝이 있는 수컷에게 암컷들이 더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건, 수컷들 다 겪어본 후에 선택할 수 없고 주어진 정보만 가지고 선택해야 하는 암컷의 입장에서는 다른 암컷이 그 수컷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어떤 여자가 그 남자를 선택해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남자가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라는 데이터로 처녀들에게 전달이 된다. 즉,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없던 매력이 20%는 생겨난다는 거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까 괜시리 마누라가 ‘내 남편 때 빼고 광내놨더니 처녀랑 만나고 다닌다’는 억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걍, 애정이란 평생 신경 써서 구해야 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인데, 그걸 게을리 해서 남자가 다른 여자한테 한눈 팔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고 본다. 그 화살을 ‘멍청한 처녀’들에게 돌리는 게 부당하다는 말이다. 그 처녀들, 멍청하긴 하다. 계산적이지도 않고 자기가 왜 그 유부남에게 끌리는지 자기도 이해를 못하는 아직 덜된 처녀들이니까. 하지만 그 처녀들은 나쁘지는 않다. 그 화살을 왜 자기에게 겨누지 못하는지.
오늘 한겨레21 기사를 읽다보니 드는 생각이다.
그래서 다시 제정신으로
울릉도 여행은 6시간 40분의 선상 여행과 6시간 50분의 기차 여행과 6시간의 버스 여행과 남은 시간 동안의 도보 여행 및 숙박으로 이루어졌다고 쓰면 너무 번역체인가? 아무튼 대전으로 돌아와서 유한락스와 고무장갑을 사서 화장실부터 말끔하게 청소하고, 방을 전기청소기로 밀고 (사실 청소기를 당기기도 하는데 관용적 표현은 ‘전기청소기로 민다’이다) 밀대가 없어서 방을 닦지는 않은 채로 지내는데 화장실 전구가 나가서 전구를 사서 끼우고 등등을 한 후에 약 먹고 한 번 토하고 이아고님을 만나 점심을 먹은 후 돌아와서 악몽이 가미된 낮잠을 잔 다음에 깨어나니 비로소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 듯 하다. 그래서 이제 밀려있는 일들을 처리해야지. ㅜㅜ
Femme Fatale
‘여우처럼 꼬리친다’라는 말이 있다. ‘내숭 떤다’는 말도 있다. ‘여시같은 기집’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들은 주로 여자들이 다른 여자를 accuse할 때 쓴다. 그런 비난의 핵심은 ‘저년은 내 남자를 정말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꼬셔서 이용해먹는다’이다.
정말로 ‘저년’이 그 남자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런 척 하는지는 ‘저년’만이 알 것이다. ‘저년’에게 이용당하는 남자들은 이용당하다 버림받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년’이 자기를 정말 사랑했다고 믿는다. 어떤 경우는 버림받은 후까지도 ‘저년’이 자기를 진정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떠났다고 믿는다.
만약 ‘저년’이 그 남자를 정말 사랑했으나 어쩔 수 없이 그 남자와 헤어지게 된다면,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한 셈이다. 그렇지 않고, ’저년’이 그 남자의 단물만 쪽쪽 빼먹고 버린 경우라면 ‘저년’은 그 남자에게 femme fatale이 되는 관계가 성립한다.
드라마 시청자의 입장에서 ‘저년’이 순정파인지 femme fatale인지는 판단하기 쉽다. 드라마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순정파 여주인공, ‘저년’은 femme fatale.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전지적 시점을 가질 수 없는 현실 던젼에서는 그 여자가 순정파인지 ‘femme fatale’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더 난감한 경우는 ‘저년’ 스스로도 자기가 순정파인지 femme fatale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다.
영화 ‘매트릭스’가 말하는 대로 세상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세계가 있지만 그것과 별도로 각자가 인지하는 세상이 존재하고 각자는 자신의 오감으로 인지하여 자신의 두뇌에서 재건축하는 뇌내 이미지로서의 세상이 있다면, 한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떠나간 여자가 순정파인지 femme fatale인지 잘 모르겠다면 더 이상의 걱정을 버리고 그녀를 사랑하면 된다.
모든 것은 좀비로 환원된다
내가 좀비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그럴싸하게 둘러대라면, 좀비 영화는 B급 호러물의 겉모양을 빌어 인간들의 세상을 비웃는 해학이라는 점이다.
조지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 전작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인간들이 좀비라는 냉소다. 20세기의 좀비들은 발을 질질 끌면서 걸어다닌다. 발을 질질 끌면서 천천히 걸어다니는 좀비들은 늙은이들이다. 신경통 걸려서 빨리 못 움직이는 영감탱이 꼰대라는 거다.
21세기에 들어와 좀비들은 팔팔하게 뛰어다닌다. 젊은 놈들이 좀비라는 거다. 우리나라를 보면 20대들이 좀비다.
좀비영화 감독들이 우리나라 사회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선 21세기 좀비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네 나라를 들여다보고 좀비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영화들이 만들어진 사회의 젊은이들도 다 좀비다.
좀비의 특징은 뇌가 없어서 아무런 생각을 못하는데 살아있는 인간의 살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낸다는 거다. 요즘 20대들은 비판적 사고를 하는 뇌가 없어서 아무런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지만 ‘취업’의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낸다. 그리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팔팔하게 뛰어다닌다. 비록 그것이 요즘 20대에게만 국한된 특성이라고 할 수 없고 상황이 강제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조지 로메로는 좀비 시리즈에서 파시즘에 대한 경고를 집어넣었다. 군중들이 생각없이 몰려다니며 사람 잡아먹고 건물 부수고 하는 행위는 파시즘의 결과적 현상의 하나다. 요즘 20대들이 파쇼화되어간다는 몇몇 사람들의 우려는 이미 21세기 초반에 좀비 영화에서 제기된 것이다. 하하.
50대 꼰대 좀비들이 망쳐놓은 세상에서 20대 좀비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좀비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다.
30대는 좀비 아니냐고? 30대가 좀비가 되려면 시체가 좀더 썩어야 된다.
꿈의 해석
죽음의 꿈에는 요즘의 내 강박관념들이 잘 드러나 있다. 어쩌면 시의적절하게 그런 꿈을 꾸게 되었다.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죽음이란 걸 좀더 가깝게 느끼면서 살게 되지만, 어느덧 2년이 지난 지금 충분히 건강하게 살고 있다 보니 그걸 자꾸 까먹는다. 자꾸 욕심을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deserve하는 것 이상에 욕심을 부리게 될 때가 생긴다.
그러다가 어저께 다시 내가 죽음에서 그닥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상기해주는 글을 읽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죽음이 그닥 멀리 있지 않지)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된 상태로 살 필요가 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그런 꿈을 꾼 것이다.
죽음의 꿈
피곤해서 낮잠을 잤는데 꿈을 꿨다. 악몽이라는 태그를 붙일 수도 있을 법한 꿈이지만 악몽보다는 현시몽이라고 부르련다.
어느 날, 일이 몰리지 않고 한가한 주의 주말에 나는 시골의 절로 간다. 가족들한테는 내 결심을 알리고 떠나는 것이다. 절에 도착해서 나는 주지 스님에게 입적하겠다는 의사를 전하는데, 이건 말로 하지 않는다. 꿈 속의 사람들은 이심전심으로 다들 알고 있다.
때마침 절에서는 일요 법회가 진행중이었고, 법회가 끝나자 사람들이 너도 나도 보시를 하는 바람에 혼잡해져서 나의 입적을 거행할 분위기 조성이 되지 않았다. 피곤한 김에(이건 현실과 동일) 자리에 드러누워 이불을 덮고 기다리는데 어느샌가 모친께서 내 맞은 편에 누워 계신다. 나 들으라는 듯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시는데 대략 ‘죽고 싶다는데 죽어야지’라는 취지의 말인듯.
그때 나는 누군가가 내 입적을 방해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죽음의 방법이란 다른 사람들이 살인이나 살인 방조의 혐의를 받지 않도록 독극물 흡입에 의한 사망으로 진행이 되어야겠지라는 생각도 한다. 약을 먹으면 숨쉬기도 힘들어지고 혈압도 올라가고 하면서 무지하게 힘들것이라는 생각도 해내다가 잠이 깨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