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 Jacques Rousseau – A Discourse on the Arts and Sciences

진정 혁명적인 저작들은 염산 항아리에 던져져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글쓴이들의 빵에는 몰래 비소가 첨가되었고, 시체들은 공동화장터에서 원인모를 죽음을 당한 다른 시체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그들”은 허용할 수 있을 만큼의 혁명적인 사상들만 의도적으로 살려둠으로써 이 사회가 충분히 자유롭다는 착각을 대중들 사이에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그것을 “그들”이 원했던 것이다.

from K. Rudalston, Undercurrent.

쟝 쟈끄 루소의 “예술과 과학에 대한 논설(A Discourse on the Arts and Sciences)”은 그의 저작 중에서는 못 쓴 편에 속한다. 이 글의 주제는 이것이다.

“예술과 과학의 회복이 인간의 도덕을 순화하는 효과가 있었는가 아니면 오염시키는 효과가 있었는가?”

“Whether the Restoration of the arts and sciences has had the effect of purifying or corrupting morals.”

계몽시대 철학자답게 기초부터 쌓아나가는 논리적 전개로 전반부를 잘 이끌어나갔지만 후반부에 든 논거들에는 반론의 여지들이 있다. 루소 역시 그가 속한 시대에 발을 딛고 있었기에 그가 속한 상황에 충실한 논리전개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과학에 대한 논설”에는 오늘날 한국사회에까지도 적용되는 부분들이 있다. 예술과 과학(Arts and Science)이 인간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발달된 것이 아니고 예술가와 과학자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는 부자들의 허영심(vanity)와 자만심(pride)을 충족시키기 위해 추진되어 왔다는 지적은 예술과 과학의 발달 정도와는 관계없이 어느 시대나 맞는 얘기이다. 거기에 물질적인 욕구도 포함시킨다면 좀더 맞는 얘기일 것이다.

가까이는 황우석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황우석이 거대한 사기를 친 것은 그의 과학(혹은 사기)이 난치병 환자에게 치료법을 제공하기 위해서 진행된 것이 아니고 황우석 자신의 명예와 자만심, 그리고 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굳이 황우석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다른 과학자들은 이에서 자유로울까? 루소가 살던 시기에 그의 눈에 비친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난치병 정복의 날을 앞당기기 위해 의대에 진학한다고 말하는 고등학생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르거나 혹은 지나치게 영악하다.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과학”은 광고 문구나 정치적 프로파간다에서만 존재할 뿐 인류 역사상에는 없었다. 루소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의 예술과 과학을 얼음장처럼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번역된 것을 읽기보다 영어문단을 읽기를 권한다.)

정부와 법제도가 안정과 인간 존재에 필요한 물질들을 제공하는 동안에는, 독재적이지는 않지만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 예술, 문학, 과학 같은 것들이 사람들을 옭아맨 쇠사슬 위로 꽃다발들을 쏘아올린다. 이들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자유의 느낌을 억제하며 자신의 노예생활을 사랑하도록 만들며 따라서 그들이 소위 말하는 문명화된 시민이 되도록 한다.

So long as government and law provide for the security and well-being of men in their common life, the arts, literature and the sciences, less despotic though perhaps more powerful, fling garlands of flowers over the chains which weigh them down. They stifle in men’s breasts that sense of original liberty, for which they seem to have been born; cause them to love their own slavery, and so make of them what is called a civilised people.

루소의 철학은 맑스만큼이나 혁명적이지만 그의 이름이 한국에서 자유로이 유통되었던 것은 그의 혁명적 사상들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박제된 빨갱이는 불에 타 없어져도 박제된 철학자가 살아남았던 것은 루소의 사상이 정권이 허용할 수 있을만큼만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빨갱이 잡느라 바빠서 죽은 철학자에 신경쓸 시간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학교의 국민윤리 교육은 학생들이 철학에 눈을 뜨게 하기보다는 철학을 멀리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상상일까? 아니면 철학을 수박 겉핥기로 맛보여줌으로써 철학자들의 진정한 사상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도록 하는 고도의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악플보다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 한다. 이는 철학 사상에도 적용된다. 루소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의 사상은 박제된 박쥐나 다름없다.

“그들”은 사람들이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왔고,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과학의 진보가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는 명제나, 땅은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다라는 명제, 혹은 그를 뛰어넘어, 땅은 반드시 누군가의 소유여야 한다라는 명제를 의심하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계획은 점점 완성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존 로크, 장 자크 루쏘, 푸르동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사상가들은 “그들”이 허용할 수 있는 만큼의 혁명적 사상을 말했기 때문이다.

다시 고쳐서 말하면, 우리가 존 로크, 장 자크 루쏘, 푸르동을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그들의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그들”의 계획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3 thoughts on “Jean Jacques Rousseau – A Discourse on the Arts and Sciences

  1. 아, 장 자끄 루소의 저작들은 인터넷에 다 있습니다. 저작권이 만료되어 공중(public domain)에 속해 있는 저작들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재산권 사상의 흐름을 되짚어 가다보면 이런 정보들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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