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예술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번역한 책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 실린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회화적 관점이 아니라 종교적 관점에서 그려진 종교화들은 나를 웃길 뿐이네. 보티첼리 같은 초기 이탈리아 화가들, 혹은 반 에이크 같은 초기 플랑드르 화가들, 크라나흐 같은 독일 화가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 화가들이나 벨라스케스, 그리고 다른 많은 자연주의 화가들과 같은 이유에서만 관심을 끈다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p. 186.

위에 언급된 화가들을 별로 안 좋아한 반면, 고흐는 밀레의 자연주의적 사실주의를 좋아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에서 위의 종교화가들이나 플랑드르 화가들 그리고 네덜란드 화가들은 매너리즘의 표상이었을테고 밀레는 매너리즘을 극복할 한 방향을 제시한 거겠지요. 고흐의 다른 편지에 좀더 자세한 얘기가 나옵니다.

아카데미의 인물화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 더 고칠 곳도 없고, 실수 하나 없이 매끄럽게 그려졌지. 그러니 ‘그 이상 더 잘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그런 그림은 우리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끔 이끌어주지 못한다.

밀레, 레르미트, 레가메이, 도미에 등이 그린 인물은 그렇지 않다. 그들도 물론 구성을 잘했지만,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방식은 아니다. 인물이 아무리 아카데미식으로 옳게 그려졌어도 현대 회화의 특징인 개인적이고 친밀한 느낌과 행동이 결여된다면, 앵그르가 그렸을지라도 피상적인 그림에 불과하다. …

… 그런데 옛 네덜란드 화파의 그림에서 밭갈이 하는 농부나 바느질하는 여자를 단 한 명이라도 본 적이 있니? 그 화가들이 일하는 사람을 그리려고 노력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벨라스케스가 그의 “물장수” 속에 일하는 사람을 그리거나, 민중 속에서 모델을 찾은 적이 있을까? 전혀 그런 적이 업다. 전 시대 그림의 등장인물이 하지 않은 것, 그건 바로 노동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p. 129.

고흐는 그림을 독학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시작하지 않았죠.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살면서 잠시 아카데미 쪽에서 배우긴 했지만 얼마 배우지 않고 그만 둡니다. 그림에 대한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바로 위의 편지에 나오는 고흐의 생각은 아카데미에서는 잘 수용이 안 되었습니다.

내가 대학 초년 때 읽은 책이 서경식이 지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입니다. 당시 그림 보는 눈을 넓혀 보겠다고 집어든 책입니다. 이 책은 지금도 꽤 많이들 읽는 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자인 서경식씨는 군사독재 시절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까지 받은 재일교포 형제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입니다. 서경식은 형들이 감옥에 가있는 동안 마음의 고통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의 심적 고통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녹아있습니다. 일독을 권하는 책입니다.

고흐의 종교화에 대한 대목을 읽으면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일감으로 떠오른 이유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주로 종교화 위주로 이루어져 있고, 같은 그림을 보는 데 있어 고흐와 서경식의 시각차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흐가 위에서 “웃길 뿐”인 화가로 언급하는 보티첼리를 봅시다. 보티첼리는 그의 “비너스의 탄생”이 아도비 포토샵의 제품 이미지로 쓰일 정도로 많이 알려진 화가입니다. “수태고지” 역시 보티첼리의 대표작 중의 하나죠. 수태고지(annunciation)이라는 주제는 보티첼리 뿐만 아니고 무수한 작가들이 그려댔던 소재이기도 합니다. 서경식은 보티첼리의 “수태고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보티첼리의 그것에서는, 수태를 알리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방금 헐레벌떡 달려온 것같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처녀 마리아가 놀라서 몸을 비틀하는 모습, 특히 두 손이며 허리 모양새 등에 참으로 풍부한 표현이 담겨 있다. 수태고지의 그 한 순간을 스냅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다이내믹한 움직임이 화면 전체에 넘치고 있다. 이 화가는 이 기독교 종교화의 대표적인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비너스의 탄생” 등의 이교적 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약동을 구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p 22.

 

  

책에는 보티첼리의 “수태고지”도 화보로 실려 있습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읽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그림에서 보지 못한 것들을 너무나도 많이 읽어내고 있는 듯한 서경식의 감상들이 당혹스러웠던 것입니다. 같은 그림을 보는 데에도 느끼는 바가 그렇게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던 겁니다.

내가 보는 보티첼리의 “수태고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들이 적용되는 세계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아주 부자연스러운 포즈의 조합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어떤 말을 하고 있길래 두 손바닥이 앞을 보도록 내밀고 있는 것일까요? 마리아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로 몸을 비틀고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미는 자세는 어떤 뜻일까요? 과연 이 두 사람의 포즈가 한 번의 “스냅 샷”에 찍힐 수 있는 자세일까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보티첼리는 “수태고지”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일련의 동작들을 한 그림에 다 그려 넣었습니다. 거기에서 “다이내믹한 움직임이 화면 전체에 넘치”는 모습은 찾기 힘듭니다.

서경식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그가 접한 종교화에 대해 평하면서 일관되게 그 회화적 아름다움을 극찬합니다. 그의 종교화에 대한 자세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화에서 내가 느낄 수 없었던 회화적 아름다움을 그가 느끼고 있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잘 느끼고 비교적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림에 대해 깊이 감정이입하며 들려준 이야기들이 그의 개인적인 불행한 경험과 맞물리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 책이었습니다.

고흐가 종교화에 대해 쓴 위 구절들을 읽고 나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으면서 느꼈던 이해할 수 없고 좁힐 수 없는 간극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회화라는 분야에서 서경식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위대한 고흐라는 이름에 기대어서 서경식의 시각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또한 서경식이 종교화에서 보았던 회화적 아름다움을 부인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종교화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 그림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몰라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지표를 얻은 것에 만족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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