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열풍

요근래에 소개팅 혹은 그와 유사한 만남을 가진 여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은 질문이 있다.

“와인 좋아하세요?”

2~3년 전에는 다른 질문을 받았다. 

“사진 좋아하세요?”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농구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것과 문법은 같은 문장이지만 의미는 많이 다르다.   문맥이 다르니까. 

소개팅에서 ‘와인 좋아하세요?’나 ‘사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그 문맥을 떼어놓고는 큰 의미 없는 단순한 질문이 된다.  소개팅이라는 문맥에서는 단순하지 않은 질문이다.

소개팅에서 하는 일 중에 나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하지만 상대로 나온 여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로 판단되는 것은 양측이 서로의 취향이나 기호가 비슷한가이다.  (내가 이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거를 비슷하게 좋아하는 여자를 찾기 힘들다는 포기이다.) 

2~3년 전에는 사진을 좋아하는지를 물어보다가 요즘은 와인을 물어본다.  바뀌는 질문을 통해 취미의 유행도 시절에 따라 바뀌는 걸 알 수 있다.   요즘은 DSLR이 워낙 대중화되어 있어서 “사진이 취미예요”라는 말은 “시간 나면 친구들이랑 술마셔요”만큼이나 하나마나한 말이 되어버렸다. 

사진이 취미로서의 쿨함이 시들해가는 시점에 그 자리를 급속도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 와인이다. 

술 거의 안 마시는 내가 와인을 취미로 할 턱이 없지.  내가 술을 좀 마신다 하더라도 와인 유행 (열풍으로 접근 중)은 불편하게 생각할 거다.  오디오 매니아들은 음악을 좋아하는 것보다 기계를 더 좋아하는 부류들이므로 고깝게 생각하는데, 그만큼이나 so-called 와인 애호가들도 고깝다.   와인을 마시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좀 살만한 사람들이 고급스런 취미활동을 즐길 여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와인을 즐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에 들어가고 싶거나 혹은 자기가 이미 그 계층에 들어가 있다고 착각하는 부류들까지 와인 유행에 동참해 있다. 

요즘에 여기저기서 말이 들리는 ‘와인 배우는 모임’은 또 뭐란 말인가?  와인이 언제부터 배워서 마시는 고급 학문이 되었나?  평소에 책들은 안 읽고, 공부도 별로 안 하면서 와인은 특별히 ‘배우는’ 이유는 뭘까? 

우리나라 와인 유행을 부채질 한 것이 탈아입구를 갈망하는 일본에서 나온 ‘신의 물방울’이라는 것도 좀 웃기다.  하기야 미식가 유행도 ‘맛의 달인’ ‘초밥왕’ 등 일본의 음식 만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지.

나는 와인 열풍을 하나의 거대한 hoax라고 본다.  몇년 전에 유수의 와인 잡지 (프랑스 잡지)에서 와인 전문가들을 상대로 blind-test를 한 적이 있었다.  (reference를 잃어버려서 제공이 안됨)  blind-test의 목적은 전문가들이 그렇게 칭송해마지않는 와인들이 대중적인 와인에 비해 정말 맛이 뛰어난가를 검증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예상하겠지만, 전문가들은 최상급의 와인과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와인을 정확하게 구별해내지 못했다. 

이 결과로 최상급 와인의 가치가 바닥에 떨어졌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대중적인 와인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니까.  다만 최상급 와인과 대중적인 와인 사이의 격차는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와인 전문가들도 최상급 와인과 대중적인 와인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면, 와인을 ‘배우는’ 의미가 있을까? 

이야기는 사천으로 오래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소개팅에서 서로의 취미와 기호를 맞춰보는 데 “와인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적당하지는 않다.  와인 열풍도 몇 년 지나면 다른 유행에 밀려날 테니까. 

하지만 그 질문은 한 가지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남자와 여자가 새로운 유행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그 수용의 속도가 비슷한가를 맞춰볼 수 있다.  이건 서로의 취미와 기호가 비슷한가라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  유행은 계속 새로이 만들어질테고 사람들은 사진에서 와인으로 옮겨타고 와인에서 또 새로운 유행으로 옮겨탈 것이다.  그럴 때 나처럼 그런 유행 무시하고 좋아하는 덕후 놀이나 하고 있는 사람과, 유행에 민감하며 새로운 취미 활동을 적극 받아들여서 ‘와인 배우기 모임’에 돈 내고 나가는 여자는 잘 맞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4 thoughts on “와인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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