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 스님

일미스님 미 애리조나대 교수 임용

일미스님의 결혼식에 갔었다.  그게 벌써 5년 전이구나.   당시 뉴욕 불광사에 잠시 다니면서 이래저래 알게 되었고, 결혼식에 청년회(그때는 ‘청년’이란 이름도 어색하진 않았다)에서 단체로 참석하기로 해서 묻어서 갔다.   그 결혼식은 동네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산속에 있는 기도원에서 행해졌다.  요가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몇주 단위로 retreat를 가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만큼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에 지어진 기도원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결혼식 하객들이 돌아가면서 일미스님과 어떻게 인연이 맺어졌으며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씩 하는 순서였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할만큼 일미스님을 잘 알지 못해서.  ㅡㅡ; 

같은 학교, 같은 직장,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결국은 제각각으로 길을 찾아가는 와중에 잠시 마주친 것 뿐이다.  그때 잠시 마주친 일미 스님이 이제 종교학 교수가 되셨다 하니, 그 분은 그 나름의 길로 정진해오신 것을 알겠다.  나는 나대로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살고 있고. 

그때 불광사 신도들 사이에서는 일미스님이 결혼하는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조계종이 지배적인 종파인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스님이 결혼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을테니까.  그것도 하나의 교조주의인데 말이다.

만화 ‘맛의 달인’에 보면 스님이 마늘을 먹지 않는 것을 꼬집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스님이 마늘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마늘이나 고기가 육욕을 강하게 만들어 수련에 차질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맛의 달인’의 주인공 지로는 마늘과 고기가 주는 육욕도 극복하지 못하면서 무슨 수련을 하느냐고 꾸짖는다. 

금욕은 많은 종교에서 필수로 요구하는 수련 방법이다.  금욕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종교마다 설명이 다르다.  그런데, 말과 수레의 순서는 어느덧 바뀌어 어떠한 종교적 성취를 위해 금욕을 한다는 도구로서의 금욕이 아니고 금욕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교조주의에 빠지게 되는 종교들이 많다.  불교도 마찬가지.  금욕은 수련의 방편일 뿐인데 하드 코어 교조적 조계종 신도들은 육욕 자체를 부정하고 육욕을 초월한 존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육욕이라는 건 인간 존재와 떨어져서 생각하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육욕 자체가 삶을 드라이브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기도 하다.  자기가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답을 궁구하다보면 육욕이나 종족번식의 본능에 대해 답을 해야 하는 시점이 오게 된다.  그걸 정면으로 마주해서 답을 구해야 하는 것이 어떤 깨달음으로 가는 한 발걸음이다.  

일미 스님의 결혼 때문에 불광사를 떠난 신도들은 그들의 믿음이란 것이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바스락거리는 종이장 위에 세워져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일미 스님의 결혼은 오랜 전통의 조계종에 진부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지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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