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날 – 공전과 벼랑끝 절충의 가능성

상위 수준의 회의에 참가해 보면, (상위라는 것에 가치평가가 들어가있는 것은 아니고 위계체계 속에서 그렇게 흔히들 불리는 개념으로 쓰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당연히 개인의 이해관계는 차치하고 상위 수준의 가치판단에 따라 회의에 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근데,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정말 상위 수준의 가치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거든. 상위 수준의 회의로 갈수록 오히려 더 개인 차원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곤 하는 것이 흥미로워.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논의의 진행을 교착에 이르게 하는 사람들의 부류는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예전에 인터넷상 저작권 논쟁이 내 블로그에서 잠시 있었을 때, (그건 논쟁이라기보다는, 논리보다 감정이 앞선 불만 가득찬 자들의 아우성이었지만) 한 블로거가 다른 블로거에게 가서 XX님은 이 주제에 대해 입장을 밝혀주셔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식의 제안을 한 걸 봤었다. 그 댓글을 읽은 블로거는 ‘그래야 할 것 같긴 한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네요’류의 답변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말은 평소에 그 블로거가 소위 진보스런(이 표현이 부정확한 거긴 하지만) 진영에 속해있다고 자타가 인식하는 사람이어서 다들 그런 행동을 기대했던 것이다. 진영논리는 이성적인 검토와 판단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편을 갈라버리기 때문에 논의를 교착상태로 이끌어가기 쉽다.  ‘저작권 논쟁’의 경우와 비슷한 양상이 상위 수준의 회의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정치적 진영논리로 무장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밀어붙여서 종국에 다다르게 될 종착지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회의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고도로 기술적인(공학적이든, 인문학적이든, 아니면 법적이든) 문제를 다루고 있을 때에 그런 경우가 많다. 기술적인 부분들에 대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고, 특히 그 문제들이 개념이나 정의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아직까지 합의된 개념이나 정의가 없는 경우, 결과를 예단하고 한쪽 방향으로 밀어붙였을 때 도달하게 되는 종착지가 “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네?”라면 벙찌는 것이지.

그래서 거대한 그림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아주 세밀한 하위 수준의 기술적인 내용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세밀한 기술적인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큰 그림에 대해서만 얘기하려고 할 때 우스꽝스러운 결과가 나온 사례들이 많다.

이건 학문의 경우에도 적용되는데, 아이추판다님의 블로그에서 벌어졌던 라깡 논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고, 최근의 칸트 논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하부적인 것으로 인문학자들이 치부하는 자연과학에서의 20세기 이후의 성과들이 철학과 인문학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을 하부의 기계부속 정도로 생각하는 단계까지 오해가 이어진다. 이런 인문학자들의 오만함은 무지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스로는 자기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공자가 말한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배움의 시작이라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는데, 상위 수준의 회의이든가 인문학이든 철학이든 인지과학이든, 세밀한 기술적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지식없이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훌륭한 CEO는 자기 회사의 제품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어떤 기술적인 장점이 있으며 어떤 단점이 있고 다른 회사 제품과 비교하여 어떤 강점이 있고 어떤 약점이 있는가에 대한 세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훌륭하지 않은 CEO들은 재무재표와 주식 기법 그리고 정치적 인맥 활용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아, 그리고 곁다리로 ‘저작권 논쟁’으로 돌아가면, 저작권 논쟁 때 ‘나는 전설이다’에서 밤이면 주인공의 집을 에워싸고 농성하던 좀비들처럼 내 블로그에 돌을 던지던 블로거들 중에 저작권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게 내가 댓글로부터 판단한 바다. 저작권법의 세밀한 기술적인 내용은 관심없고 큰 그림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싶다고 하겠지. 그리고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논쟁’이 끝나고 난 후의 머쓱함과 허탈함 정도?

그리고 지금 내가 참가하고 있는 이 회의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슈들에 대해 ‘큰 그림’ 차원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사람들 역시 비슷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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