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200년 밖에 안 된 미국

열등감의 발현일 수도 있는 “역사가 200년 밖에 안 된 미국”이라는 말을 가끔씩 듣는다. 열등감 때문에 그런 말 한 거면 그냥 그 사람이 열등감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몇몇 사람들은 아주 진지하더라 이거지.  그래서 역사가 5,000년인 한국은 미국이 가지지 못한 대단한 걸 가진 것처럼 말하는데.

대놓고 반박하진 않지만, 난 “역사가 200년 밖에 안 된 미국”이라는 말을 아주 웃긴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초등, 중고등, 대학을 다니면서 배우고 알고 있는 한국의 역사나 문화는 내가 미국의 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미국의 역사나 문화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거든.  ‘역시 미국 유학 갔다 오더니 친미파가 되어버렸군’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말은 ‘친미파가 아니라 지미파야’ 정도이겠지만.  (Jimmy Parr?)

200년의 역사 동안 미국이 만들어 놓은 풍부한 문화, 역동적이면서도 (겉모양이나마) rule-based 절차를 통해 이루어놓은 정치/법 시스템,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청교도 정신에 바탕하여 근검 절약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 풍조, 등등등.  문화, 정치, 법, 사회 morale 등 어느 면에서든 한국이 미국보다 나은 점이 있나?

정말 역사가 5,000년인지도 검증해봐야 하지만, 설사 5,000년의 역사라 한들 그 5,000년의 역사가 지금의 한국이 이만큼이나마 사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었으며 지금 한국인의 삶에 어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본다면…

미국이 18세기 19세기에 해놓은 것들, 그리고 그때 만들었던 연방헌법, 연방법원체계, 그리고 매년 풍부한 판례와 성문법으로 쌓아올려진 법 체계.  당시 미국 민법의 케이스들은 상당 부분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운 법률 관계를 다루고 있거든. 예를 들면 철도가 동서를 연결하는데, 철도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망사고, 부상사고. 철도를 통해 물건을 배송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계약 불이행 사건. 땅에서 석유를 캐내는 데 발생하는 석유 소유권 문제 등등. 이런 내용들을 죽 읽다가 문득 미국에서 그런 케이스들이 발생했을 때 조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를 생각해 보면 갑자기 암담하지. 그야말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두컴컴한 나라가 떠오르는 것이지. 그게 바로 4,800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의 모습이었지. 

미국 건국시부터 2009년 10월 21일까지 미국에서 만들어진 활자로 된 자료들, 그것이 법문이든, 소설이든, 혹은 음악이나 미술이나 그런 것의 총량을 5,000년의 한국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자료들, 음악, 미술의 총량과 미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간단히 생각해 봐도 비교가 안 되는 질문 아닌가? 설마 그 질에 있어서 한국 것이 미국 것보다 평균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

그니까 ‘200년 역사 밖에 안 된 미국’이라는 찐따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길. 같은 논리로 역사가 100년 밖에 안 된 Republic of Korea가 역사가 250년 된 미국보다 더 나은 나라가 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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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역사가 200년 밖에 안 된 미국

  1. 하워드 진은 미국사의 시작을 이른바 신대륙의 발견 시점에서부터 서술하더군요. 건국시점이 아니라 발견시점에서 민중사를 보는 거죠. 그렇다면 실제로는 500년도 넘는 역사죠.

  2. 최호영 says:

    오랜만에 형 블로그에서 안티양산형 민감한 포스트를 보는군요 ^^. 사실 5000년 역사를 내세우는게 자존심에서부터인지 열등감에서부터인지 묻는다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봐야하지 않을까요? 마치 잘 사는 집 애에 대한 열등감에 우리집 아빠가 네 아빠보다 나이 많다고 자랑하는 심리같다는 느낌도 들고..
    다만 미국의 200년 역사는 길게보면 마치 고대 로마 시대만큼 하나의 화려한 Spot이 될 가능성도 있겠지요. 건전한 사상과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던 시기가 연속되지 못하고 암울하고 답답한 시기가 단절, 교차하는건 긴 역사에서의 어쩔 수 없는 흐름같은거니까요. 사실 지금 미국이 고대 로마와 종종 비교되기도 하구요.
    논지가 이상해지는데 미국도 역사가 한 1000년쯤 넘어가면 결국 돌고돌아 찌질해지는 때가 올 수도 있겠죠.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데에는 나도 한 때는 잘 나가 봤는데, “너 그러다 한 방에 훅 간다”라는 요즘 유행어의 심리가 자리잡고 있는건 아닌지.. ^^

  3. 낚시질이 잘 안 돼. ㅡㅡ
    말마따나 지금까지 미국이 이뤄놓은 것만 해도 고대 로마와 비견할만하지 않나?
    한 1000년쯤 지나면, 정치적으로는 대의제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케인즈 경제학과 밀턴프리드만의 시카고학파 경제학을 섞은 자본주의라는, 정치와 경제에서의 두 가지 큰 실험이 행해졌던 시대라고 자리매김될 것 같기도 하고.

    우리도 나름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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