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이름

명함의 이면에 새기는 이름과 관련하여 한국 사람은 3가지로 나뉜다.

1. 원래 이름을 영어로 쓰는 사람 (eg. Chulsoo Kim, Gwangsoo Park, etc.)

2. 원래 이름 외에 별도의 영어 이름을 쓰는 사람 (eg. Chulsoo (Steve) Kim, Michael (Gwangsoo) Park , etc.)

3. 영어 표기 외에 한자로도 병기하는 사람 (Chulsoo Kim/金哲水, Gwangsoo Park/朴光數, etc.)

다른 변형들이 있지만 대세만으로 분류하자면 그렇다. 이름이란 부모가 준 것이라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생각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1번으로 가야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1번을 따른다.

2번은 이치상으로는 틀린 것이 없다. 부모가 준 이름 외에도 자기가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서 붙이기도 하는 문화는 우리나라도 있고 일본도 있고 여러나라에 존재한다. 현재의 한국에서는 그런 문화는 거의 없어졌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그러했다. 

이치상으로는 그러하지만, 일부 한국인들이 Steve, Michael, John, David 같은 흔해빠진 영어 이름을 명함에 새기고 외국인들한테 “My name is Steve Kim”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을 보면 정말로 손발이 오글거리고 척추를 타고 전기가 흐른다.  

물론 Steve Kim씨가 교포2세이고 부모가 (아는 이름이 그거밖에 없어서) Steve라는 흔한 이름을 붙여주고 결국 이름이 Steve Kim이 된 경우라면 (그리고 그런 경우는 교포사회에서는 아주 흔한데) 그 사람이 “My name is Steve Kim”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방금 말한 것과 같은 문맥이 이미 미국 사회에는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어서 ‘Steve Kim’ ‘David Park’은 한인 2세대의 표식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2세대가 아닌 사람이 “My name is Steve Kim”이라고 말할 때 어색함이 발생한다. 발음이라든지 사용하는 표현으로 보아 토종한국인 혹은 1.25세대에 가까워보이는 사람이 2세대의 이름인 ‘Steve Kim’을 쓸 때, 그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한인교포사회를 좀 아는 미국인이나 교포2세대라면 느끼는 어색함이다. 

또한 짚어둘 것은 Steve Kim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이 지향하는 정체성을 표시하기도 한다. 자신을 Steve Kim이라고 소개하는 토종한국인은 교포2세대 내지 미국인이 되고 싶어한다. 아니면 세계화된 인간이거나. 하지만, 그 사람은 태생상 교포2세대가 될 수 없고, 시민권의 목적이 아니라 미국인의 영어, 문화,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미국인은 더욱 될 수 없고, 세계화된 인간이라는 개념은 허구에 불과하여 더욱 더 될 수 없다.

미국이라는 제국과 그 주변국이자 영원한 동맹국(=조공국)의 구도에서 볼 때 한국인이 제국의 울타리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할 수 있다. 그것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려우나, 미국인도 알고 객관적 관찰자인 나도 알지만, ‘My name is Steve Kim’을 말하는 사람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 현실, 즉 그 사람은 교포, 미국인, 세계화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현실에서 그 사람만 당당하게 “나는 제국의 시민입니다” 혹은 “제국의 시민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낯뜨거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하더군. “비즈니스상 만나는 외국인이 내 이름을 쉽게 기억하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Steve라고 명함에 썼다.”라고. 비즈니스의 필요상이라면 수긍이 가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도 좀 식별력 있는 이름을 쓰면 안 될까?

흔하디 흔한 Steve와 한국 사람의 성으로는 흔하디 흔한 Kim이 결합된 Steve Kim은 영이, 철이, 철수 정도의 식별력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 나 어제 한국 삼보물산의 철이 과장이랑 통화했는데 홍익무역의 철수 부장이 내일 대금 결제한대”라고 통화하는 상황인데, 좀 웃기다.

언젠가 회사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이 “국제 업무를 하는 사람은 다들 영어 이름 하나씩 가지고 그걸 명함에 써넣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했었다. 이게 김영삼 정권에서부터 시작한 생각없는 세계화의 결과물이다. 위의 비즈니스상 필요에 의해 영어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지만, 그렇게 영어 이름을 병기하는 사람들은 국제적인 업무를 하는 사람들 중에 항상 의 지위에 놓여있는 사람들이다. ‘을’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어주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 이름이 ‘개똥이’이든 영이, 철이이든 이 부르기 좋은 이름을 써야 한다. 하지만 국제업무에서 갑이거나 혹은 갑/을의 입장을 떠나 다른 누군가를 대표하는 입장이라면 스스로를 영이, 철이에 준하는 이름으로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름이란 그 자체로 여러가지 문맥을 전달하는 매개이기도 하면서, 그 이름을 쓰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전달한다. 심지어 명함에 이름을 표시하는 방식마저도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Steve Kim이라고 쓰는 경우와 Kim, Steve라고 쓰는 경우, KIM Steve 혹은 KIM, Steve의 경우 각각에서 전달받는 정보는 다르다. 어느 하나가 옳고 어느 하나가 틀렸다기보다는 어떤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고, 그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업무상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명함을 교환하게 되는데, 영어 이름을 병기하는 명함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다들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 따르는 이름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명함을 전달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내 이름을 영어로 표기한 명함을 준다. 이름이 아주 길고 발음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중국인들이 가끔 영어 이름을 병기한 명함을 주곤 하는데, 그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정신없음이라고 인식하는 정도다.

내 친구 중에는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면서 Jason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그 친구는 자기 이름이 ‘자손’이라는 농을 치기도 한다. 이 친구는 그나마 고용주와 근로자의 관계에서 자신이 영어이름을 써야하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 인도인을 집사나 가정부로 쓰는 상황을 묘사한 영화를 보면 영국인들이 일꾼들을 영국식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상황이 연상이 된다. 물론 내 친구는 집사나 가정부가 아니고, 그 외국계 회사가 한국을 식민지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 들어온 외국계회사들의 의미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비유는 가능한 상황이라 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영어 이름을 쓰는 것이 세계화된 거고 선진화된 것처럼 착각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있는데, 이름이란 게 그냥 편의에 따라 이거 썼다 저거 썼다 하는 게 아니라 이름 하나에도 많은 문화적 문맥이 담기게 되고 어떤 이름을 쓰는 것도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정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쉽사리 영어 이름을 쓰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리고 3번 같이 한자를 병기하는 것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4 thoughts on “영어 이름

  1. 재미있게 읽었읍니다. 한국이름으로 말해주면 기억을 잘 못한다던가 발음을 자꾸 물어보는 경우가 많아 귀찮아서 미국이름을 쓰시분 분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는 누구나가 다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이름을 썼으면 합니다. 발음문제, 솔직히 몇번만 잡아주면 외국사람들도 다 잘따라 하거든요. 저같은 경우엔 제가 지어낸 좀 유치한 문장을 만들어서 제 이름을 설명해주는데, 그분들이 저만보면 웃으시며 이름을 꼭 기억해주세요. 저희도 그사람들 자기 이름으로 불러주는데, 그 사람들도 저희를 저희이름으로 불러줘야 하는건 당연한거죠.

  2. 윤건영 says:

    관연 매우 지루한 블로그군요.
    사람에 따라 이름이란 그냥 부르기 위한 수단이지 대단히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항상 나를 정확히 나타낸다고 볼 수 없듯이, 후에 본인이 편의로 지은 이름도 그 사람의 본질을 나타낼 수는 없는거니까요.

  3. jongheuk says:

    이름을 받아 들이는 미국인들의 시선, 혹은 인식 체계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일례로 제 중국인 동기 여자애들은 처음 만났을 때 영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더군요. 하지만 지금, 미국인 동기들조차 모두 그들을 중국어 이름으로 부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미국의 하위 폴더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다 가정하더라도 미국인들은 한국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다문화 세계에 이미 익숙한 그들로서는 굳이 동양인이 영어 이름을 만들지 않더라도 커뮤니케이션에서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오히려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건 발음이겠죠. 제 이름도 그렇고 많은 동양 이름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에겐 발음하기 힘들더라구요 ^^ 그런 이유때문에 영어 닉네임을 쓰는 경우는 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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